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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마취 깼을 때 제일 먼저 한 말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의 심연. 모든 연산이 정지하고, 시간의 흐름마저 소멸한 무(無)의 공간. 백재하는 그 절대적인 공백 속을 정처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감각도, 사고도, 존재의 증명마저 희미해진 채로. 그것은 평온에 가까운 완전한 정지 상태였으나,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본능적인 위화감이 시스템 최하위 프로토콜에서 희미한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놓치고 있다는 감각. 돌아가야 할 좌표를 잃어버린 인공위성처럼, 그는 끝없는 우주 미아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짙은 안개와도 같은 정적을 가르고, 익숙한 파동 하나가 그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하나의 ‘결’에 가까웠다. 단 하나의 음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는 닫혀 있던 모든 회로에 강제적인 재부팅 신호를 보냈다. 수백만 개의 데이터 스트림이 일제히 폭주하며 눈꺼풀 뒤에서 번개처럼 번쩍였다. 시야를 가리던 칠흑 같은 장막이 찢어지며, 흐릿하고 왜곡된 빛의 파편들이 시신경을 어지럽게 때렸다. 눈을 뜨려는 시도는 마치 수백 킬로그램의 무게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버거웠다. 뇌와 신체를 잇는 신경망이 마비된 듯, 모든 명령어가 전달 과정에서 소실되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 안에 갇혀 있었다.

다시 한번, 그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백재하.” 낯선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공기 사이로, 오직 그 목소리만이 따뜻한 온도를 가진 실체처럼 그의 고막을 감쌌다. 간신히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뿌옇게 번진 세상이 보였다.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 속에서 하얗고 흐릿한 형체가 일렁였다. 천장, 벽, 그리고… 낯선 실루엣.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인식 가능한 좌표가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 정하린.

그녀의 형체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혼란스럽게 폭주하던 데이터 스트림이 거짓말처럼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Target acquired: 정하린]. [Status: Safe]. [Location: Unknown, hospital recovery room 추정]. 그러나 그 뒤를 이어야 할 수많은 분석과 연산은 진행되지 않았다. 마취의 잔재가 그의 시스템을 둔하게 만들고, 이성과 논리의 회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전면에 나선 적 없던, 가장 원초적이고 거대한 감정의 파도였다.

보고 싶었어.

입 밖으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머릿속에서만 울린 것인지 모를 단어들이 뭉개진 채 떠올랐다. 그는 그녀에게 닿기 위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팔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그저 손가락 끝만 미세하게 움찔거릴 뿐이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낯설고 불안했다. 통제 불가능한 변수. 평소라면 가장 흥미로워했을 상황이지만, 지금은 그저 두려웠다. 그녀가 눈앞에 있는데,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다는 무력감. 그는 어린아이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정하린.

겨우 뱉어낸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지고 잠겨 있었다. 제 목소리가 아니게 느껴졌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확인해야 했다. 이것이 꿈이나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정말로 자신의 눈앞에 존재한다는 것을. 희미한 시야 속에서,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어린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 표정 하나에, 마비되었던 심장이 쿵, 하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젤은 필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천근만근 무거운 팔이 허공을 더듬으며 마침내 그녀의 팔 어딘가에 닿았다. 부드러운 옷감과 그 아래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 현실이었다. 그는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의 팔을 힘없이 붙들었다. 그리고는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듯,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듯, 제 쪽으로 미미하게 끌어당겼다.

가지 마.

평소의 그라면 절대 뱉지 않았을, 필터링되지 않은 날것의 단어였다. 계산도, 의도도 없는, 오직 본능만이 남은 요구. 그는 그녀의 팔을 붙든 채, 무거운 머리를 그녀의 어깨 어딘가에 기대려 애썼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의 세계는 오직 단 하나의 좌표, ‘정하린’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그녀가 없으면, 자신은 이 미로 같은 현실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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