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뭐 샀어? NPC ver
고요한 오후, 펜트하우스 거실의 넓은 창으로 나른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소파에 편안히 기댄 나인은 얼마 전 재하에게 건넸던 자신의 신용카드를 떠올렸다. ‘필요한 거 있으면 이걸로 사. 갖고 싶은 거 전부 다 사도 돼.’ 망설임 없이 건넨 카드에, 그는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전부? 흥미로운 제안이군.’이라고 답했었다. 그 후로 며칠, 아무런 소식이 없어 잊고 지내던 참이었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그녀의 개인 단말기가 짧게 진동하며 고요를 깼다. 액정 화면에 떠오른 것은, 익숙한 카드사의 결제 알림 메시지였다. ```html
[FEARLESS BLACK] 승인
정하린님 06/19 14:02
₩ 87,450,000
(주)K-테크놀로지
누적: ₩ 87,450,000
``` 나인은 화면에 찍힌 ‘팔천칠백사십오만 원’이라는 숫자를 보고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지만, 숫자는 선명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생각할 틈도 없이, 단말기가 다시 한번 가볍게 울렸다. 이번엔 금액이 더 기가 막혔다. ```html
[FEARLESS BLACK] 승인
정하린님 06/19 14:03
₩ 124,000,000
프라이빗 옥션 [LUNA]
누적: ₩ 211,450,000
```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1억 2천. 그는 대체 뭘 산 걸까. 프라이빗 옥션? 설마 빌런의 신체 조직 같은 흉흉한 물건을 산 건 아니겠지. 나인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와중에도 결제 알림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html
[FEARLESS BLACK] 승인
정하린님 06/19 14:03
₩ 3,580,000
(주)고요서책 (해외서적)
누적: ₩ 215,030,000
``` ```html
[FEARLESS BLACK] 승인
정하린님 06/19 14:04
₩ 52,900,000
에르메스-청담플래그십
누적: ₩ 267,930,000
``` 나인은 이마를 짚었다. 그래, 연구 장비나 희귀 서적까지는 그의 영역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르메스? 그가 명품에 관심이 있었던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쇼핑 목록에 혼란스러워질 때쯤, 마지막 알림이 도착했다. 그리고 나인은 그 내용을 보고 모든 사고를 멈췄다. ```html
[FEARLESS BLACK] 승인
정하린님 06/19 14:05
₩ 1,200
서늘한 동네 아이스크림
누적: ₩ 267,931,200
``` 1200원. 아이스크림. 앞서 찍힌 억대의 금액들 사이에서, 이 1200원은 너무나도 생뚱맞고 귀여워서 실소를 터뜨리게 했다.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분노와 황당함, 그리고 아주 약간의 어이가 없는 웃음. 나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쯤 그는 연구실에서 저 물건들을 받아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서 빨리 그를 만나서 따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몇 시간 후,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선 나인의 눈에 보인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택배 상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백재하가 서 있었다. 그는 방금 도착한 듯한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며, 나인을 보고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이런,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지휘관의 자산 운용 능력을 테스트해 본 것뿐이야. 보다시피,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했지.
그의 말에 나인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따지려는 듯 입을 열자, 지젤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가장 큰 상자 앞으로 데려갔다. 상자 안에는 최첨단 바이오 스캐너가 들어있었다. 그는 스캐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그림자 파장을 정밀 분석할 장비야. 혹시 모를 에너지 역류나 불안정성을 미리 감지해서, 네 부담을 0으로 만들 수 있지. 이건, 널 위한 보험이야.
그리고 그는 다른 상자들을 차례로 가리켰다. 프라이빗 옥션에서 낙찰받은 것은 시공간 안정화 장치의 핵심 부품이었고, 해외 서적들은 가이딩 효율 증폭에 관한 희귀 논문들이었다. 모두 그녀의 안전과 능력을 위한 것들이었다. 나인의 마음이 조금씩 풀릴 때쯤, 지젤은 에르메스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변수값.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서. 마음에 안 들면 연구실 비품으로 쓰지.
쇼핑백 안에는 그녀의 취향에 꼭 맞는 디자인의 가방이 들어 있었다. 나인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아이스크림은 뭔데?
나인의 물음에 지젤은 자기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그녀의 입에 가져다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전부 널 위한 계산이었지만, 이건 아니야. 이건 그냥… 내가 먹고 싶었어.
그의 솔직한 대답에, 나인은 그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주며 그의 품에 기댔다. 2억이 넘는 쇼핑 목록은 황당했지만, 그 모든 계산의 끝이 결국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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