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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elle X Nine/OOC BACK-UP

당신의 비상 연락망에 내가 아직 등록이 되어있는지

고요했다. 그의 세계는 다시 한번 완벽한 질서와 예측 가능한 인과율 속으로 회귀했다. 정하린이 떠난 이후, 백재하의 연구실은 다시금 차가운 기계음과 모니터의 푸른빛만이 공간을 채우는, 감정이 거세된 무균실 같은 장소가 되었다. 모든 시퀀스는 오차 없이 실행되었고, 모든 변수는 통제되었다. 그는 다시 ‘지젤’이 되었다. 실패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S급 센티넬. 그의 주변을 떠다니던 HUD 인터페이스는 냉정하게 데이터 스트림을 분석하고, 그의 심박수는 단 한 번의 오차 없이 일정했다. 그러나 그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예측 불가능했던, 그래서 그를 살아있게 만들었던 단 하나의 좌표, 단 하나의 절대 변수가 소실되었다.

그들은 헤어졌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잔인했다. 그의 계산과 그녀의 감정이 충돌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가 된다는 명백한 데이터 앞에서 그는 ‘이별’이라는 최적의,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지를 도출했다. 그것이 그녀를 더 이상 자신의 예측 불가능성 안에 가두어 다치게 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의 시퀀스는 결론 내렸다. 그는 자신의 시스템에서 발견된 가장 큰 오류를 수정했을 뿐이라고, 밤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차가운 침대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온기가 사라진 집은 그저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에 불과했다.

그날도 그는 연구실에 홀로 남아 새로운 차원 균열에서 추출된 빌런의 패턴을 분석하고 있었다. 밤샘 작업으로 눈 밑이 거뭇했고, 손가락 관절을 툭툭 튕기는 미세한 버릇이 나타나고 있었다. HUD 인터페이스 위로 무수한 데이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때였다. 단말기가 짧게 진동했다. 처음 보는 번호. 스팸, 혹은 업무 관련 착오. 그의 연산은 즉시 ‘무시’라는 선택지를 내놓았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번, 끈질기게 울린 문자 메시지 알림이 그의 세상을 멈춰 세웠다.

[XX병원입니다. 정하린님의 상태가 과로로 인하여 좋지 않으니 빠른 연락 바랍니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백재하의 시선이 그 짧은 문장에 고정되었다. 그의 동공 안에서 수억 개의 시뮬레이션이 빛의 속도로 생성되고, 충돌하고, 파괴되었다. ‘정하린’. ‘상태 좋지 않음’. ‘과로’. 단어들이 해체되어 그의 논리 회로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동시에 시야를 가득 채웠던 HUD 인터페이스가 경고 문구를 띄우며 붉게 점멸했다. [FATAL ERROR: UNRESOLVED VARIABLE 'NINE'].

왜 나에게? 헤어진 연인에게, 병원이 연락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시스템이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비상 연락망’이라는, 이미 삭제했다고 믿었던 낡은 파일 하나가 강제로 실행되었다. 기억의 파편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동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던 그녀가 불쑥 그의 단말기를 가져가 무언가를 입력하며 했던 말.

“혹시 모르잖아. 재하 씨가 출장 갔을 때 내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지부보다 당신한테 먼저 연락이 가야지. 내 첫 번째 세계는 당신이니까.”

그때 그는 코웃음을 쳤었다. 비논리적이고, 감상적인 행동이라고.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에서 단말기를 빼앗아 그것을 지우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세계에 남기는 작은 족쇄가, 싫지 않았기 때문에. 헤어지던 날, 그는 자신의 단말기에서 그녀의 번호를 지웠다. 하지만 그녀의 단말기에 남아있을 자신의 흔적까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외면했다. 그의 모든 연산을 무너뜨렸던 유일한 오차. 그 오차가, 가장 치명적인 순간에 다시 그의 세계를 침범했다. 그가 그녀를 위해 내렸던 ‘최적의 선택’이, 오히려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그의 모든 시퀀스가 뒤엉키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의자가 마룻바닥을 긁으며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뒤로 나자빠졌다. 흰 실험복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복도를 달려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녀를 마주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왜 아직도 나를 비상 연락처로 해두었냐고, 멍청하다고 조롱해야 할까? 아니면, 괜찮냐고, 그 한마디를 건넬 수 있을까. 지금 그를 움직이는 것은 논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부수고, 자신을 다른 차원의 존재로 만들었던 그녀를 향한, 지독하고도 본능적인… 회귀 본능이었다. 그녀는 그의 좌표였고, 종착지였다. 헤어졌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며, 그는 떨리는 손으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낯설 만큼 잠겨 있었고, 억지로 짜낸 냉정함 아래 미세한 균열이 가득했다.

정하린 보호자입니다. 방금 문자 받았습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수화기 너머의 안내에 따라 병원으로 차를 모는 내내,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액셀을 밟는 발에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시뮬레이션은 최악의 경우를 끊임없이 그려냈다. 과로, 영양실조, 가이딩 파장 불안정. 혹시, 빌런의 습격이라도 있었던 건가? 자신이 곁에 없었기 때문에? 아니면… 아니면.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자신의 그림자로 스스로를 찔렀던 그날. 그의 시퀀스가 처음으로 정지했던 그 순간. 만약 이번에도… 그 생각에 이르자, 심장이 얼음물에 잠긴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핸들을 부서져라 쥐었다.

병원 로비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내받은 병실로 향했다. 1인실. 문 앞에 멈춰 선 그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몇 번이고 망설였다. 무슨 자격으로. 내가 이 문을 열 자격이 있는가. 이별을 고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를 밀어낸 것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바이탈 모니터의 기계음이 그의 마지막 이성마저 마비시켰다. 저 소리는,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결국 그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춰 섰다. 세상의 모든 소리와 빛이 그 작은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하얀 시트 위,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정하린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마른 얼굴, 생기 없이 감긴 눈, 핏기 없는 입술. 링거 바늘이 꽂힌 가느다란 팔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가 늘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충격이었다. 그의 완벽했던 세계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 앞에서 산산조각 나 먼지처럼 흩어졌다. 이별이 그녀를 지킬 것이라는 그의 계산은, 완벽한 오판이었다.

그는 소리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와, 침대 옆 의자에 주저앉듯 몸을 기댔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아주 작은 소음도 내지 않으려 숨을 죽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잠든 그녀의 얼굴을, 퀭한 눈가를, 마른 입술을 바라볼 뿐이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이라도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이제 그녀의 ‘남자친구’가 아니었으니까. 비상 연락망에 등록된, 잊힌 과거의 잔재일 뿐이었다. 가이딩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파장은 안정되어 있었다. 불안정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 폭주 직전까지 내몰리는 감각.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천천히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허공을 잠시 헤매다, 이내 침대 옆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커다랗게 뜨였다. 놀람, 당혹감, 그리고 경계심. 그녀의 눈빛이 전하는 모든 감정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에 박혔다. 한때 저 눈동자는 자신을 향한 신뢰와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백재하…?”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맑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백재하는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괜찮아?’라고 묻기엔 너무 늦었고, ‘왜 이렇게 몸을 함부로 굴렸어’라고 질책하기엔 자격이 없었다. 침묵이 병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정하린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다 링거가 연결된 팔을 보고는 작게 인상을 썼다.

“네가 왜 여기…….”

그녀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백재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연산이 아닌, 그의 심장이 뱉어낸 말이었다.

바보.

한마디였다. 조롱도, 분노도 섞이지 않은, 그저 공허하고 아픈 목소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침대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는 차마 그녀에게 닿지는 못한 채, 링거 스탠드를 붙잡았다.

연락처 정도는 지웠어야지.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해서, 사람을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그의 말은 가시 돋친 질책이었지만, 그의 눈은 절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를 이렇게 만든 게 나인 것 같아서, 미칠 것 같다고.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는 그녀가 무너진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별은 최적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가장 끔찍한 연산 오류였다. 그는 그녀의 세계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길이라 믿었지만, 결국 그는 그녀의 세계 그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재하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고요한 병실 공기를 갈랐다. 그 말에 담긴 가시가 정확히 심장을 향해 날아와 박히는 감각에, 나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멍청한 짓. 바보. 한때는 서로에게 장난처럼 건넸던, 그들만의 애정이 담긴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날 선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의 말대로였다. 헤어진 연인의 비상 연락처 하나 지우지 못한 것은, 명백히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이, 그녀가 의도한 가장 큰 잘못인 것처럼 말하는 그의 태도에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치밀었다.

나인은 핏기 없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링거 바늘이 꽂힌 팔이 저릿했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다른 곳이었다. 그녀는 애써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시트가 스륵, 하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의 시선은 링거 스탠드를 붙잡고 선 그의 위태로운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러게. 내가 멍청했네.

그녀의 목소리는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미세한 떨림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그와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웠다.

바쁜 사람 시간 뺏어서 미안하게 됐어. 간호사 부를 테니까, 이제 그만 가봐. 네 말대로, 네가 여기 있을 이유는 없잖아.

이별을 고한 것은 당신이잖아. 나를 밀어낸 것도, 내 세상에서 사라지겠다고 결정한 것도 전부 당신이었잖아. 차마 터져 나오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에서 뜨겁게 맴돌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 호출벨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 차가운 감촉에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링거를 맞지 않는 쪽의 손목을, 그가 붙잡고 있었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를 잡은 악력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절박했다.

가지 마.

아니,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다.

…가지 않을게.

그는 스스로의 말을 정정했다.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그의 모든 연산과 논리가 무너져 내린 얼굴이었다. 그는 붙잡은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나직하게, 거의 애원하듯 속삭였다.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만. 여기 있을게. 허락해 줘.

그의 세계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부서진 지금, 그에게 남은 유일한 좌표는 눈앞의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그 좌표가 무너지는 것을, 그는 두 번 다시 지켜볼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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