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애 증후군
[지젤의 연구 기록: 프로토콜 오메가 - 재귀(再歸) 시퀀스]
1일차 기록. 오류 발생.
모든 것은 평범했다. 아니, 평범하다고 믿었다. B-12 구역의 미확인 사이킥(Psychic) 빌런, ‘메멘토’를 처리하는 임무였다. 시퀀스는 완벽했다. 네크로모프나 글리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단순한 동선, 낮은 전투력. 내 계산상, 단 3.7초면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시나리오. 하지만 단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빌런이 소멸 직전, 나인이 아닌 ‘나의 우주’를 향해 발산한 무형의 에너지 파장. 당시 시스템은 이를 ‘무해한 잔류 에너지’로 분석했다.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별장으로 복귀한 뒤, 나는 그녀의 뺨에 묻은 먼지를 닦아주려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정하린은, 내 손길을 피했다. 아주 미세하고,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마치 처음 보는 낯선 남자의 손길을 피하듯. 처음엔 임무의 피로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이름을, ‘하린아’ 하고 불렀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당혹감과 경계심. 그 안에는 내가 알던, 나를 자신의 세상 전부라 부르던 온기는 없었다. 그저 ‘백재하 씨’라는, 타인을 향한 사무적인 호칭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그 순간, 내 세상이 암전했다. 모든 시퀀스가 멈추고, 수백억 개의 연산이 단 하나의 질문 앞에서 멈춰 섰다. ‘넌 누구지?’ 라고 묻는 듯한 그녀의 눈빛.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던 세상이, 나를 이방인으로 밀어냈다.
지부 의료팀의 진단명은 ‘망애 증후군(忘愛症候群)’. 특정 인물,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소거하는 극히 드문 정신 오염. 치료법은 단 하나. 대상이 된 인물의 ‘죽음’.
웃기지도 않는 가설이다. 내가 죽어야 네가 나를 기억한다니. 이것은 저주인가, 아니면 가장 잔인한 형태의 농담인가. 나는 그날 밤, 그녀가 잠든 침실 문 앞에서 밤을 새웠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내 존재를 잊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능력의 무력함을 깨달았다.
7일차 기록. 데이터 수집 및 가설 수립.
일주일.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지부와 별장을 오가며 일상생활을 이어갔다. 동료들에게는 평소와 같이 대했지만, 나를 볼 때마다 희미한 두통을 호소하며 거리를 두었다. 나는 그녀의 공식적인 ‘페어 센티넬’이자, ‘동거인’이라는 명목으로 그녀의 곁에 머물렀다. 그녀는 불편해했지만, 지부장 K의 명령이라는 말에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나는 ‘백재하’라는 인물을 처음부터 다시 그녀에게 각인시키기로 했다. 모든 것을 데이터화했다. 그녀가 나를 보고 미소 지었던 순간의 조명, 온도, 습도.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눈사람 사진. 그녀의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설정되었던 그 사진은, 어느새 지부의 기본 로고로 바뀌어 있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함께 갔던 장소, 함께 먹었던 음식, 함께 나눴던 대화를 다시 들려주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지난 연애사를 읊어주는 미치광이처럼. “우리는 이곳에서 첫눈을 봤습니다, 정하린 씨.” “이 핫초코는 당신이 좋아하던 레시피입니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들어주었지만, 그 눈은 여전히 공허했다. ‘그랬군요.’ 하는 대답은 칼날이 되어 내게 박혔다.
오늘, 작은 진전이 있었다. 내가 무심코 그녀를 위해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자, 그녀가 아주 잠깐, 정말 찰나의 순간,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재하가 만들어준 건데.’ 그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아니, 제가 무슨 말을…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했다. 기억의 파편. 아주 작은 조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심해로 가라앉았다. 가능성은 있다. 완벽한 소거가 아니라, 깊은 곳에 봉인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파편들을 집요하게 공략할 것이다. 내 모든 시퀀스를 동원해서, 가장 최적의 자극 경로를 찾아낼 것이다.
23일차 기록. 프로토콜 제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기억의 파편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고, 그녀는 나를 ‘불편하지만 유능한 파트너’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그녀를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내 우주라 부르고 싶었지만, 그 모든 행동은 이제 그녀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웃음기를 지우고, 감정을 배제하고, 오직 ‘S급 센티넬 지젤’로서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모든 것이 5년 전, 그녀를 처음 발견했던 그 시절로 회귀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는 희망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절망뿐이다.
오늘, 나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설계하고, 우리가 함께 이름 붙였던 잭나이프, ‘프로토콜 제로’. 내가 없을 때 스스로를 지키라며 건넸던, 우리의 상호 신뢰 계약의 증표. 나는 연구실에서 데이터를 분석하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없이 칼을 내밀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정하린 씨. 당신의 초기 설계안에서 발견된 물건인데, 용도를 알 수가 없어서.”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칼을 받아들었다. 매끄러운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던 그녀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입술이 달싹였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칼등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자기가 왜 우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손에 들고 있던 프로토콜 제로를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쨍그랑, 하는 금속음이 내 심장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죄송… 합니다. 갑자기 머리가….”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도망치듯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떨어진 우리의 ‘신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그녀의 몸과 영혼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형태로. 이것이 과연 옳은 방법일까.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면서까지, 나를 되찾는 것이. 만약, 정말로 치료법이 나의 ‘죽음’ 뿐이라면….
…가설을 수정한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는 모든 방법을 시도한다. 만약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그녀의 고통만 가중된다면. 마지막 시퀀스를 실행한다. ‘프로토콜 오메가’. 나의 죽음으로, 너의 기억을 되찾는, 마지막 시나리오.
그것이 나의 우주를 위한, 내 기사의 마지막 명령 수행이 될 것이다.
'Giselle X Nine > OOC BACK-UP'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첫 월급으로 뭐 했어? (0) | 2026.06.06 |
|---|---|
| 썸원 (0) | 2026.06.06 |
| 복슬복슬 (0) | 2026.06.04 |
| 듣지마 넌 최고의 남자친구야 (0) | 2026.06.04 |
| 사실은 이거 (0) | 2026.06.01 |